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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그공 오월시민군 이정모> 출판기념 북콘서트
작성일 : 2022-04-27     조회 : 227

[행사] <이름없이 죽어간 브로그공 오월시민군 이정모> 출판기념 북콘서트 첨부파일 : 이름없이죽어간브로크공오월시민군이정모_출판기념북콘서트.jpg



[작가의 말]

1980년 5월, 그날을 기억하는가 ?
여기 죽어서도 잠 못 드는 한 영혼이 있다.

광주시민들은 누구나 다 자기 안의 오월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오월항쟁에 참여했던 개인과 가족은 물론,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은 모두, 전쟁보다 참혹했던 그날의 트라우마로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야 했다.
오월항쟁 중 수많은 사람들이 꽃잎처럼 금남로에서 스러져 죽거나 다쳤다. 그들은 청소차에 실려 망월묘역에 버려지듯 집단매장 되었고, 간신히 살아남아 붙잡힌 사람들은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수감된 사람들은 생전 경험하지 못한 생지옥을 겪어야 했다. 매일매일 참혹한 고문과 구타가 계속되었다. 인간 이하의 비정상적인 영창에서의 삶은 주체적 존재의 자존감을 깡그리 뭉개버리고 몸도 마음도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했다.
이후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또 다른 마음의 감옥이 옥죄어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트라우마는 한 인생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다. 정신병원 치료는 물론이고 술과 약에 의지해야만 하루하루를 간신히 지탱해 갈 수 있었다. 자해(自害)를 통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표출하기도 했다. 결국 철저히 왜곡되고 굴절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80년 오월항쟁 이후 공식적으로 48명이 목숨을 버렸다. 물론 통계에 잡히지 않는 ‘5 · 18자살자’가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5 · 18자살자’는 죽어서도 죽음을 조명 받지 못했다. 자살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너무나 컸기에 감히 드러낼 수가 없었다. 오월항쟁에 참여한 것을 두고 폭도니 불순분자니 치부했고, 감옥을 다녀 온 범죄자라는 낙인이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오월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5 · 18자살자’의 가족은 죽음마저도 쉬쉬 하면서 통한의 눈물을 머금고 장례를 치러야 했다.
1980년 오월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이정모씨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이정모씨는 나의 둘째형이다. 브로크공 노동자로 평범하게 생활하다 1980년 오월을 대면하게 되었고, 자발적으로 1980년 5월 21일 시민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5월 27일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종료할 때까지 형은 총탄과 선무방송이 뒤섞인 생사의 길목에서도 전일빌딩을 마지막까지 지켰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형은 그 다음 날인 28일 아침, 계엄군에 붙들려 상무대 영창에 수감되었다. 영창에서 진술서, 자술서, 심문조서 등을 강제적인 상황에서 작성하였다. 온갖 고문과 구타와 억압 속에 재판을 받으며 5개월의 수감 생활 끝에 1980년 10월 24일 마침내 석방되었다.
이후 형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극심한 트라우마로 고통을 받다 지난 1984년 12월 5일 전남대학교병원 맞은편 여인숙 골방에서 약을 먹고 서른 한 해 짧은 생을 버렸다. ‘5 · 18자살자’가 된 것이다. 
 
이 책은 전남대학교5 · 18연구소 유경남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었다. 5 · 18기념재단, 5 · 18민주화운동기록관, 전남대학교5 · 18연구소 주최로 2021년 5월 12일부터 6월 30일까지 5 · 18기념문화센터에서 열린 5 · 18기록물 유네스코 10주년 기념전시 ‘법앞에서’ 기획전시에 초대 받았다. 전시 준비를 하면서 뜻하지 않게 이정모 형의 재판기록을 입수하게 되었고, 그간 의문투성이였던 오월의 행적을 퍼즐 맞추듯 꿰어낼 수 있었다. 
‘법앞에서’ 기획전시에 이어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5 · 18민주화운동기록관, 5 · 18기념재단 주최로 2021년 8월 17일~29일 5 · 18민주화운동기록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2021 부마아카이브전 - 이웃집 투사들’ 기획전시에도 역시 참여하게 되었다. 첫 번째 글을 조금 다듬어서 부마아카이브전에 참여했다. 
이 두 기획전시에 참여하면서 형의 재판기록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간직한 형의 이야기를 그냥 역사 속에 묻혀버리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생애사 작업은 다음의 세 가지에 천착했다.

― 왜, 형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가. 
― 무엇이 형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 전두환 반란군부의 국가폭력으로 인해 개인과 가족은 어떻게 파편화되었는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형의 생애사를 정리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형에게 진정한 해원(解寃)의 빗장을 열어드리고 싶었다. 
걸판지게 상을 차려놓고 굿을 한다고, 영혼결혼식을 한다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녹아들까. 국가유공자가 되어 국립5 · 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고 편안히 두 눈을 감을 수 있을까. 재심청구로 무죄를 선고받았다고 과연 해원이 되었을까.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갈기갈기 찢겨지고 무너져 내린 육신, 마음의 절망, 통곡, 고통, 상처와 눈물을 누군가 단 한번이라도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보듬어 안아주었다면 그래도 과연 자살을 선택했을까 싶다. 

형을 비롯한 오월시민군들은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분명 세상에 토로하고 싶었을 것이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청춘과 꿈과 희망마저 단단한 절망의 벽에 갇혀버린 그들은 가슴 밑바닥에 응어리진 멍울들을 세상 밖으로 가슴 절절히 토해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진정성 있는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손길을 내밀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오월시민군은 한 명 두 명 ‘5 · 18자살자’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 나는 폭도가 아니다. 
― 나는 불순분자가 아니다. 
―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원통하고 분한 그 마음에 족쇄를 채워 서른 한 살 짧은 생을 버렸다.
1980년 오월광주의 죽음 위에 민주주의라는 싹을 틔웠음을 기억한다면 오월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뒤틀리고 왜곡된 역사적 진실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우리 이웃들, 그 중 스스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비록 한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5 · 18자살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 가족들이 쉬쉬하며 감내해야 하는 속울음을 관음(觀音)의 손과 눈으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고자 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 자살을 선택해 이름없이 죽어간 오월시민군 이야기를 사실에 바탕을 두어 기록했다. 형의 상무대 영창에서의 재판기록물들 즉 진술서, 자술서, 심문조서 등을 바탕으로 해서 오월관련 책과 영상 등을 수없이 살피고 또 살피면서 역사적 사실을 놓치지 않고자 했다. 
오월의 트라우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미 늦었지만 뒤늦게라도 ‘5 · 18자살자’들의 고통과 눈물을 함께 나누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48명이나 되는 ‘5 · 18자살자’와 그 가족들에게는 참된 해원을, 오월광주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오월의 역사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또 하나의 오월교과서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이 책이 오월의 전국화, 오월의 세계화에 일조할 수 있다면 더없이 큰 기쁨이겠다.
― 정모형이 세상을 떠난 지가 어느 덧 마흔 해가 다 되어간다. 그 때 딱 지금의 내 나이셨던 어머니가 올해로 구십삼 세가 되셨다. 지금의 내 나이에 어머니는 생때같은 자식을 잃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하늘은 그날처럼 여전히 푸르고 깊다.

6개월에 걸쳐 오월시민군 이정모 형의 마음을 헤아려 해원의 그림작업을 해준 민중미술가 이상호 님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추천의 글로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준 광주문화재단 황풍년 대표이사는 언제 어디서든 든든한 지원군이다. 
또한 광주광역시교육청 시민참여담당관 정봉남 시민참여팀장과 경인지역에서 새얼문학회를 이끌고 있는 김현주 선생님이 교정 교열과 감수를 맡아 주셨다. 깊은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1980년 전두환 반란군부의 폭압적 위력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5 · 18자살자’와 그 가족, 그리고 31세로 짧은 생을 마감한 오월시민군 이정모 형을 비롯해 먼저 가신 아버지 이호근, 93세인 어머니 박도님과 사랑하는 가족 모두에게 이 책을 바친다.

이천이십이년 오월
이해모  |  오월시민군 이정모의 동생




[추천의 글]

바람 끝이 유순해지고 햇살이 아련하다. 겨우내 무등산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던 하얀 눈발도 감쪽같이 스러지고, 봄이다. 햇볕은 한량없고, 천지사방에 생명이 움질대는 새봄의 길목에서 ‘오월’을 헤아린다. 
그래! ‘마흔두 번째 오월’이구나.

봄이 깊어질수록 광주 곳곳이 두런거린다. 광주사람들뿐이랴. ‘1980년 광주’를 잊지 못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봄이면 어김없이 ‘오월’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예술가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시를 읊고 그림을 그리고, 몸짓과 연주로 애틋한 오월의 꽃을 피워낸다. 생때같은 자식새끼와 피붙이를 잃은 가족들에게 오월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들이 풀어내는 말과 글은 서리서리 생생하고, 설움 또한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는다. 
생태·환경을 살리는 종교운동가 이해모 씨도 그러했다니. 과연 오월의 통증은 예기치 않는 곳, 우리 곁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큰거린다. 늘 밝은 웃음을 달고 사는 그의 마음자리에도 80년 오월의 생채기가 선연했다. 그가 42년 세월을 찬찬히 되짚어 시퍼런 멍울을 어루만지듯 가슴 시린 이야기를 풀어
냈다.

《이름 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시민군 이정모》.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한복판에서 총을 든 시민군이었던 자신의 둘째형 이정모 열사의 이야기책이다. 
착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시골 청년의 안타까운 삶과 억울한 죽음, 그 짧고 애달픈 생애에 바치는 아우의 헌사다. 그렇지만 그는 시민군 형의 사연을 민주주의라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주투사의 영웅담으로 꾸미지 않았다. 
《오월시민군 이정모》는 국졸 출신의 가난한 브로크공, 스무 살 청년이 겪은 80년 오월을 복원한 소중한 기록이다. 파란의 역사에 휩쓸려간 개인사요 가족사이자 광주민중항쟁사다. 마침내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강물에 닿는 감동적인 서사다.
“태어나서 10만여 명의 군중을 만난 것도 처음이다.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러본 것도 당연히 처음이다. 엄청난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껴본 것도 처음이었으며, 시민군이 되어 길거리에서 생활한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게 처음이라 낯선 시공간이지만 스펀지에 물이 스며들 듯 정모는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되어 역사 속에 서 있었다.”

작가 이해모는 ‘해방광주, 오월공동체’ 구성원들의 경이로운 집단의식과 행동을 ‘처음’과 ‘자연스럽게’에서 찾았다. 형의 행적을 좇으며, 형이 살았던 시공간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단순하되 참으로 명징한 광주항쟁의 열쇳말이다.      
잔혹한 학살과 끔찍한 장면도 처음, 몸서리치는 공포와 두려움도 처음, 인간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처음이었다. 그 엄청난 충격을 딛고 수많은 시민이 항쟁에 나서고, 마침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오월시민군 이정모까지. 인간다움의 집단적 표출과 떨쳐 일어선 민중의 출현이란 기실 ‘자연스럽게’였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오월시민군 이정모의 내력을 따라가다 보면 알게 된다. 80년 오월과 지난했던 민주화의 여정에는 착하고 여리고 가난했지만, 따뜻하고 반듯하고 당당했던 수많은 이정모들의 피눈물이 뿌려졌다는 것을.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와 인권이란 이정모들의 사랑과 헌신, 이웃을 향한 연민과 인간의 도리에서 비롯되었음을. 그리하여 오월이 남긴 불멸의 교훈을 톺아보게 된다. 

《이름 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시민군 이정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라도 쉽게 읽어도 좋을 소설이다. 몇 번이고 다시 보아도 물리지 않는 인물 동화책과 같다. 
특히 친일매국노들과 독재부역자들을 예술의 법정에 세우고 가차 없는 단죄로 정의를 곧추세운 민중화가 이상호 작가가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의 손끝에서 부활한 이정모 열사의 모습에서 순수한 시민군의 영혼을 만날 수 있다.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안은 민중의 굳센 의지, 사람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볼 수 있다. 
‘5 · 18민주화운동’보다 ‘광주민중항쟁’이라 부를 때, 1980년 오월의 참모습이 환하게 그려진다. 인간의 존엄함을 무참하게 짓밟는 폭압에 맞서 싸운 민중이야말로 역사의 주인공임을 웅변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 민중 속에 오월시민군의 주력이 있다. 
“평생 총을 만져볼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어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전두환 일당이 폭도라고 매도하고, 광주에 잠입한 북한군이라고 왜곡하는 허무맹랑한 선동과 거짓에 맞서는 명백한 실존으로 이정모 열사는 빛난다. 총은 들었으되 총질을 할 수 없었던 청년, 오로지 가족과 타인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정의의 상징이다. 
그가 바로 민중의 전형이다. 그가 바로 동학농민군, 항일의병, 대한독립군의 후예라는 깨우침에 전율하게 된다. 
아! 이 땅의 민중이야말로 산천 곳곳 화르르 피었다 지는 봄날의 진달래요, 뚝뚝 떨어져 눈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동백꽃이요, 고봉밥처럼 수북하게 뭉쳤다 흩어지는 망월동산의 하얀 이팝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워라. 

이 책에선 1970~80년대 광주와 화순 지역의 정겨운 지명들과 사회상도 엿볼 수 있다. 1980년 5월 광주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과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상황도 고스란히 그려진다. 이정모 열사는 형을 찾아 광주로 들어왔지만, 형은 아버지를 따라 광주를 빠져나갔다.
민주화 시위에 가담했던 형과 시국과 무관한 삶을 살았던 아우의 엇갈리고 뒤바뀐 운명이 안타깝고 가엾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군부독재의 긴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개인의 삶과 가족의 울타리가 파괴되었을지, 민중의 수난사에 아득해진다.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방광주’의 뒤끝은 참혹했다. 군부독재는 모진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수법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시민군에게 폭도라는 누명을 씌웠다. 범죄자로 낙인찍힌 이정모 열사도 세상의 외면, 가족과의 불화까지 겪으며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시종 객관적 관점으로 진솔한 서술을 담아내려는 글쓴이의 고투가 애잔해지는 대목이다. 
그리하여 이 책이 ‘오월 트라우마’를 앓는 분들에게 치유서가 되었으면 좋겠다. 부디 작가 이해모와 가족들이 깊은 회한과 그리움을 다독이며 해원에 이르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는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합니다.”
오월시민군 이정모 열사의 유서는 1980년 5월27일 새벽 최후의 항전을 떠올리게 한다. 항복 대신 죽음으로써 입증해야 하는 가치가 있었다. 5 · 18은 민주주의와 인간존엄을 끝까지 놓지 않은 의로운 저항이었음을. 전남도청에서 산화한 오월영령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2022년 봄, 죽음으로 결백을 선언했던 순박한 오월영웅이 되살아났다. 깨어있는 민주시민들이 모두 《이름 없이 죽어간 브로크공, 오월시민군 이정모》의 애독자가 되어주신다면 참 좋겠다.

이천이십이년 오월
황풍년  |  광주문화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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